日韓,고민하는 非連續線
竹島(일본명/독도)와 교과서 문제로 한국의 시민이 일본 대사관 앞에서 항의 행동을 TV에서 보고 있으면, 누군가의 이야기를 꼭 듣고 싶게 되어 서울에 전화를 걸어 보았다.
외교관 출신의 町田貢氏. 日韓 외교 정상화의 7년 전인 1958년에 外務省에 入省하여 40여년의 외교관 생활 중에 25년을 한국에서 지내고 외무성에서 제일의 한국 전문가 였다. 退官 후에도 한국에 머물러 현지의 대학에서 日韓 관계 등을 가르치고 있다.
입을 열자 마자 <日韓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관계가 되었기 때문에 어떻게 될 것인가? 자신도 상상이 가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여러 수라장을 경험 하였으며,70년대 전반에는 대사관에 난입한 데모隊에 곤봉과 철 파이프로 구타 당한 적도 있었던 역사의 증인 이다. 內心,<옛날의 과격함에 비교 하면>라고 하는 답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황 했다.
이 베테랑 마저 향후를 예상하는 것을 어렵게 하고 있는 것이 <韓國 政界의 世代 交代> 이다. 일본어 세대가 은퇴 하고 지금은 고도 경제 성장기 후에 자란 세대가 主流 이다. <자신을 갖는 것은 좋지만,對日 관계에서 어디까지가 허용 범위인가를 알고 있지 못하는 정치가가 많다. 옳다고 생각한 자신의 의견을 그대로 발산하기 때문에 위험함을 느낀다>라고 말한다.
세대 교대에 동반하여 극한 한도에 이른 장면에서의 조정에 있어 <조정자>가 없어 졌다. 知日派인 김종필 전 수상이 이전에 火鍾의 竹島를 <폭파해 버렸으면 좋겠다>라고 말한 것은 유명 하지만, 금회는 韓日의원연맹의 간부가 來日해도 일방적으로 주장을 전하기만 했지 구체적인 조정을 한 것도 아니었다.
의식면에서 확실하게 변한 것이 북조선 문제를 중심으로 하는 安保觀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일본 비판 담화의 뒤에 숨겨 졌지만, 실은 담화와 마찬가지로 각국 관계자에 충격을 준 대통령 발언이 전월 하순에 있었다. 한국의 금후의 전략에 대해서 <北東 아시아의 均衡者의 역할을 수행해 가겠다>라고 이야기 한 육군 사관학교 졸업식에서의 연설이다.
지금까지도 核問題에서의 북조선의 주장에 <一理 있다> 등이라고 발언해 온 대통령.금회는 <韓美日의 南方 삼각 동맹은 냉전 시대의 질서로 지금까지도 그 테두리에 잡혀 있는 것은 아니다 라고의 의미이다>라고 하는 측근의 해설에서도 보듯 日美韓 連携로부터의 이탈인가? 라고의 의문을 부른다.
안보가 日美韓의 유대의 줄 이었던 것은 지금은 옛말이다. 북조선에의 융화적인 무드가 넓어 가는 중에 한국내에는 <문제를 어렵게 하고 있는 것은 日美의 강경 자세>라고의 견해가 증가,북조선 문제가 오히려 日韓,美韓의 遠心力의 요소가 되고 있는 중이다.
일본으로부터 한국을 바로면 <左傾化 내셔널리즘>으로도 보이지만, 한국의 젊은 의원 등으로부터 보면 반대로 <일본이야 말로 右傾化 내셔널리즘>이라고 비쳐지고 있는 것 같다. 최근의 매끄럽지 못하고 순조롭지 못함은 그 충돌 이라고 하는 면이 있다. 일본 비판과 북조선 문제는 低流에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냉정하게>,<미래 지향적으로>라고 小泉(코이즈미) 수상은 호소,日韓 외상회담에서는 교류 계속을 확인 했다. 그것은 그것으로 중요하지만,의외로 대립의 뿌리가 깊다 라고 하면, 관계의 중요성만 주창하고 있으면 시간이 해결한다 하고 하는 것도 있을 수 없다.
日韓 관계의 발전은 과거로부터 겹쳐 쌓였다. 반면,국교 정상화 40년의 해에 예기치 않게 표면화 한 것은 세대 교대와 정권 교대,정책 전환으로 부상한 과거의 연장선 상에서는 파악할 수 없는 <비연속선상의 움직임>이다. 町田貢氏는 후배로부터 조언을 받으면 이렇게 답 한다고 한다.
<이제 과거의 연장 처럼 대응해서는 통하지 않는다. 적당히 얼버무리려서는 해결 되지 않고 상대를 알고 근본적으로 관계를 정립하지 않으면 마찰과 서로 부딪칠 각오도 필요하다>.
☞.상기 내용은 4월10일자 일본경제신문 2면의 <風見鷄(풍향계)>에 실린 <일본경제신문 정치부 차장 伊集院敦>의 글 입니다. 일본,일본인의 입장에서 본 독도,검정 교과서 등의 韓日관계에 대한 현상황 인식 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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